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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친구 에벌린은 어느 날 화가인 딸 캐서린과 함께 초원을 바라보다 일어난 일을 얘기해주었다. 이른 봄날의 시골 풍경에는 상록수의 검푸른 색과 초원 풀밭의 연두색, 떡갈나무 잎사귀의 화사한 초록색 등 온갖 초록색이 어우러져 있었다. 캐서린이 그걸 보고는 감탄해 소리쳤다. "어쩜 저렇게 초록색이 여러 가지일까?" "캐서린의 한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비로소 조금씩 다른 초록색이 눈에 들어오더라고. 매일 그 초원을 바라봤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많은 초록색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니까." 이 얘기를 듣고 나는 '화가는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는가 보다'라고 생각했다. 내가 일상적으로 보던 것을 캐서린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는 게 놀라웠다. ~ 중략 ~ 그날 아침 캐서린과 함께 초원을 바라보던 사람이 음악가였더라면 새들의 미묘한 노랫소리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겠지만 '제각기 다른 여러 가지 초록색'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. 촉감에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얼굴에 와 닿는 부드러운 바람이나 시원한 풀밭의 느낌, 맨발에 전해지는 질퍽한 진흙의 촉감을 더 민감하게 의식했을 것이다. - 블라인드 스팟(내가 못 보는 내 사고의 10가지 맹점) 중에서… 사람은 참 다양하게 만들어졌다. 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.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차이점을 발견할 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. 서로 교제하고 나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? 내가 보는 세계를 보여주고 또 다른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점점 완전해져 가는 것... 획일화는 다양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다. 하나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일탈이고 이방인이고 불량품인 것이다. 맞지 않는 부분도 억지로 맞추어야 한다. 잘 맞추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할땐 열등감에 빠지고 자학 [自虐]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. 결국 획일화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산출물은 '우열'이다. 획일화의 기준을 중심으로 우성부터 열성까지 한 줄로 줄을 세운다. 그리고 우성이 열성을 지배한다. 더 나아가 열성이 심한 경우는 제거하기도 한다. 진화론의 산물인가? 다양화의 관점에서는 획일화에서 정의하는 '열성' 이 열성이 아닌 단지 다른 종류일 뿐이다. (창세기의 '각기 종류대로' 란 구절이 떠오르네...) 제거 대상이 아닌 관심 대상이다. 획일화에서 빠질 수 있는 사고의 맹점을 다양화에서는 뛰어 넘을 수 있다. 자유의 관점에서 봐도 명백해진다. 자유를 억압하면 '획일화'가 되고 자유를 인정하면 '다양화'가 된다. (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...) 서로의 다른 점을, 서로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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